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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 데스크칼럼] 뒤란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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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이상문 작성일19-08-2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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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국장 이상문숨바꼭질을 하다가 막내를 잃어버렸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네 살짜리 막내는 술래인 형이 열까지 헤아릴 동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막내를 찾기 위해 동네를 뒤졌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냇가와 나지막한 뒷산을 이 잡듯이 살폈지만 막내의 헌 고무신 자국도 발견하지 못했다. 밭일 나갔던 어머니는 기별을 듣고 달려와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얼혼이 나가 뛰어다녔다.

  저물녘 해가 뉘엿거릴 때 반전이 일어났다. 뒤통수에 검불을 붙인 채 하품을 베어 문 막내가 뒤란에서 어슬렁거리며 등장했다. 어머니는 동생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막내의 엉덩짝을 몇 차례 갈기고 나서는 품 안에 가두었다. 펑펑 우는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는 "그만 울어, 누가 보면 초상난 줄 알겠다"고 말하시면서 헛기침 몇 번을 쏟아내고는 궐련을 붙여 무셨다. 막내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품속에서 눈망울을 반짝였다. 뒤란 창고안 덤불 속에 숨었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의 주거지에서 뒤란이 사라졌다. 뒤란은 우리 민족 삶의 문화 속에 처연하게 존재했다. 온갖 잡동사니를 간수하는 창고도 있었고 조그마한 남새밭에 상추며 파, 부추가 자라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먹다가 물린 턱찌끼를 모아 돼지를 기르던 우리도 있었고 부스스한 울타리 밑에서 기어 나오는 지렁이나 땅강아지, 쥐며느리 등속의 벌레를 집어먹고 투실투실 자라는 장닭이 뛰어노는 작은 모래마당도 있었다.

  앞마당을 버젓이 두고도 계집아이들은 뒤란에서 놀기를 즐겨했다. 좁고 어둑했지만 계집아이들은 그곳에서 공기놀이를 하거나 소꿉장난을 했다. 그러고 보면 뒤란에는 쓰다가 버리기 아까운 가장집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계집아이들은 그것을 도구삼아 어른들의 생활을 흉내내기에 몰두할 여건이 충분했다. 불과 30~40년 전 우리 주거지의 아련한 모습이다.

  뒤란은 그래서 화려하거나 툭 불거지지는 않지만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뭉근하게 자리 잡은 여유와 넉넉함의 상징이었다. 그런 뒤란이 현대식 주거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초호화 전원주택을 가도 과거 우리 뒤란을 대신하는 공간을 찾기 어려워졌다. 자연 그대로면서 그 집 주인의 성품을 고스란히 닮은 생김새를 가졌던 뒤란은 이제 어디에 가도 찾기 어려워졌다.

  환경이 단출해지면서 일상도 간단명료해졌지만 사람들의 심성은 어딘가 모르게 강퍅해졌고 이웃 간에 버성기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이 뒤란이 사라진 주거문화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견강부회다. 하지만 또 아니라고 왼고개를 치지도 못한다. 왜냐면 인간의 성정은 자신의 삶의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가 가관이다. 양보도 없고 협상도 없다. 어디 정치뿐이긴 하겠냐만 가장 노골적인 장관이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간에 화해를 붙일 세력도 없다. 뒷마당 노릇을 해줄 중간 세력이 사라진 정치판은 극단의 대결로 치닫고 있다. 총선이 다가오자 그 난장판은 점입가경이다. 국민에게는 미안하지만 잠시 뒤로 밀쳐두고 내년 총선에 다시 당선되기 위해 오로지 지역구 집토끼 잡기에 혈안이 돼 있다. 앞마당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에 조용하게 비껴 나와 담배 한 대 태우며 은밀한 중재 방법을 논의할 뒤란이 없어진 것이 개탄스럽다.

  우리 삶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저분하고 감추고 싶은 것들을 가져다 쟁여둘 뒤란이 없다. 있는 것을 모두 까발려야 한다. 은유법은 사라지고 직설적인 샤우트 창법만 횡행한다. 은근하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공간도 없다. 삶이 건조해지고 자극적으로 변했다. 그런 환경에서 정치는 환상적인 경지에까지 왔다. 정치가 그러니 다른 것들은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다.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은 베란다에 화초를 키우며 심성을 다스리고 있다. 심지어는 감별사에 의해 버려진 병아리를 사들고 와 베란다에서 키우는 아이들도 있다. 햇살이 잘 드는 쪽에 모셔두고 날마다 정성을 들인다. 제발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순화되는데 조악한 화초가, 솜털을 벗는 병아리가 기여해 주기를 바라면서 인터넷을 뒤져 아파트 화초 재배법을 공부하고 병아리 사육법을 익힌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마음속의 뒤란을 두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의 뒤란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의 여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편집국장 이상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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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